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앉아보니

[책] 박형준, 춤

박형준, 춤, 창비시선 247, 파주:창비, 2005

p. 81

조용한 봄



洞口에 포구나무 서 있다
바람이 어머니의 기도를 하늘로 밀어올린다
포구나무 밑에서  포대기를 추켜올리는 여인
저녁햇살 엉켜 있는 저 하늘의 뿌리
부옇게 떠서 더 가느다랗다
바람이 가지 끝 물보라를 툭툭 건드린다.
포대기 속 불뚝불뚝 머리를 내밀며 아이가 운다
포구나무 가지 끝 아른거리는 연둣빛 저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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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석, 고형진 엮음, 정본 백석 시집, 파주:문학동네, 2007

p.46 (정본 : 고형진 교정본)
p.204 (원본: 사슴, 1936/1/20)

광원(曠原)



흙꽃 니는 이른 봄의 무연한 벌을
경편철도(輕便鐵道)가 노새의 맘을 먹고 지나간다
 
멀리 바다가 뵈이는
가정거장(假停車場)도 없는 벌판에서
차(車)는 머물고
젊은 새악시 둘이 나린다



광원 : 넓은 평원.  백석의 고향인 정주 인근에 멀리 바다가 보이고 경편철도가 지나는 안주 박천평야가 있다.  이 시의 '광원'은 이곳을 말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흙꽃 : 흙먼지.
니는 : '일어나는'의 고어
무연한 : 아득하게 너른.
경편철도(輕便鐵道) : 기관차와 차량이 작고 궤도가 좁은 철도.  여기서는 신안주에서 개천까지 놓인 개천철도주식회사의 사설철도로 추정된다.

*경편철도 : 궤도가 좁고 구조가 간단하게 놓인 철도.  ① 용천에서 용암포 다사도 가는 철도.  ② 안주(평남) → 개천 ③ 황해도 사리원 → 해주 → 토성
*노새 : 숫나귀와 암말과의 사이에서 난 잡종. 크기는 나귀와 비슷. 몸이 튼튼하고 아무거나 잘 먹음. 성질은 온순하나 생식력은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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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에 대한 기억이 없다.  몇 장 스틸 사진처럼, 소란할새라 사라진 별똥별처럼 그렇게 스칠 뿐.  사진 속에는 사람이 없다.  무심한 일.  태어난 모든 것은 소멸의 길을 걷는다.  비어있음에서 시작해 비어있음으로 돌아가나니 태허(太虛)만이 온전하다.  기억한다는 것은 분명 거스르려는 의지.  생겨난 것은 사라지고 사라진 것은 생겨난다.  이 또한 사바세계에선 변함없는 일.  중간 같은 건 어디에도 없다.  기억한다는 것은 곧 생명, 그리고 욕망.  어느새 세상에서 사라져버린 4월은 영원히 기억해야할 순간.  벌거벗은 내가 살면 얼마나 살겠는가.  빈 하늘에 시간과 소리같은 건 원래 없었다.  키 높은 미루나무 잎들이 반짝인다.  어느 날 중학교 교정에서의 일이다.  기억나는 가장 선명한 사진들 중 하나.  무슨 일이었을까?  ...  아무튼 가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