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앉아보니

[책] 백석, 정본 백석 시집

백석, 고형진 엮음, 정본 백석 시집, 파주:문학동네, 2007

pp. 151 - 153 (정본 : 고형진 교정본)
pp. 277 - 278 (원본 : 문장, 3권 4회, 1941년 4월)

흰 바람벽이 있어 (정본)


오늘 저녁 이 좁다란 방의 흰 바람벽에
어쩐지 쓸쓸한 것만이 오고 간다
이 흰 바람벽에
희미한 십오촉(十五燭) 전등이 지치운 불빛을 내어던지고
때글은 다 낡은 무명샤쯔가 어두운 그림자를 쉬이고
그리고 또 달디단 따근한 감주나 한잔 먹고 싶다고 생각하는 내 가지가지 외로운 생각이 헤매인다
그런데 이것은 또 어인 일인가
이 흰 바람벽에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있다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이렇게 시퍼러둥둥하니 추운 날인데 차디찬 물에 손은 담그고 무이며 배추를 씻고 있다
또 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내 사랑하는 어여쁜 사람이
어늬 먼 앞대 조용한 개포가의 나즈막한 집에서
그의 지아비와 마조 앉어 대구국을 끓여놓고 저녁을 먹는다
벌써 어린것도 생겨서 옆에 끼고 저녁을 먹는다
그런데 또 이즈막하야 어느 사이엔가
이 흰 바람벽엔
내 쓸쓸한 얼골을 쳐다보며
이러한 글자들이 지나간다
―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어가도록 태어났다
   그리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내 가슴은 너무도 많이 뜨거운 것으로 호젓한 것으로 사랑으로 슬픔으로 가득 찬다
그리고 이번에는 나를 위로하는 듯이 나를 울력하는 듯이
눈질을 하며 주먹질을 하며 이런 글자들이 지나간다
― 하눌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초생달과 바구지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그리고 또 ‘프랑시쓰 쨈’과 도연명(陶淵明)과 ‘라이넬 마리아 릴케’가 그러하듯이


때글은 : 때에 그은.  때가 묻어 검게 된.  '글다'는 '그을다'의 준말.
생각하는 내 : 생각하는 동안.  '내'는 '동안'의 의미.
앞대 : 평안도에서 보아 남쪽 지방을 가리키는 말.
개포 : '개'의 평북 방언.  강이나 내에 바닷물이 드나드는 곳.
이즈막하야 : 이즈음에 이르러.
울력 : 여러 사람이 힘을 합하여 일함.  또는 그런 힘.  이 시에서는 '힘으로 몰아붙이는 듯이'로 풀이.
눈질 : 눈으로 흘끔 보는 것.
귀해하고 : 귀하게 여기고.
바구지꽃 : 박꽃.
짝새 : 뱁새.

*바람벽: 집안의 안벽.
*쉬이고: 잠시 머무르게 하고, 쉬게 하고.

....................

그런 사람...  그런 나이...